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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보] 기록의 중요성과 지식인의 책무 : 조태열 전 주유엔 대사
  • 작성자강수경
  • 작성일시2023-10-03 17:41
  • 조회수6


연초에 중견 정치학자 한 분의 전화를 받았다. 동료 학자들과 함께 제헌국회 회의록 공부 모임을 만들어 초기 헌정사를 연구 중인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탁월한 식견과 안목이 돋보이고 발언의 빈도와 질적 수준이 압도적인 한 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필자의 조부인 조헌영(趙憲泳) 의원이라는 거였다. 며칠 후 그의 초청으로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할아버님을 ‘진정한 의회주의자, 자유주의자’라 부르며 거의 모든 국정논의에 등장해 토론을 주도하며 결론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며 자기들끼리 ‘토론종결자’라는 별명을 붙였다면서 “조의원의 납북은 대한민국에 큰 손실”이었다며 아쉬워했다.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 중 한 분인 서희경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헌정사 1948-1987>에서 “조헌영 의원은 제헌국회 2년 동안 특히 헌법제정 과정 및 이후 정부형태 운영의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가였다”고 기술하였고, 권기돈 박사는 <오늘이 온다: 제헌국회 회의록 속의 건국>이라는 책에서 해방 정국에서 명멸한 큰 정치인의 한 분으로 할아버님을 언급하며 “요즘 말로 하면 최소한 대선 주자급의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남북 분단의 역사 속에 묻혀 거의 잊혀졌던 할아버님의 건국 초기 정치 행적과 활동이 70여년이 지나 제헌국회 회의록을 통해 중견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새로운 조명과 평가를 받게 된 것은 필자에게 큰 기쁨이었지만 기록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준 사건이기도 했다.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의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도 또 다른 측면에서 기록의 중요성과 지식인의 책무를 생각케 하는, 울림이 큰 글이었다. 머리말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나는 대한민국의 여러 혼란 중 하나는 이 나라 정통성과 정체성을 대표하는 사람들, 그런 기관의 책임자들이 자기 개인과 책임 맡았던 기관들의 활동 실태를 국민에게 진솔하게 진실대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나라 주류, 정체성, 정통성의 주류를 형성하는 원로들의 성찰적 자서전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나 죽기 전 나 같은 쓴 소리 기록들도 많이 쌓여 이 나라 독립과 건국에 희생된 선열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존 인사의 행적까지 거침없이 비판하며 격동의 시대를 기록한 그의 용기 있는 고백을 필자는 뜨거운 가슴으로 읽었다.

기록은 과거를 소환해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는 역할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를 밝히는 등대 역할을 한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얼마 전 원로학자 한 분은 필자의 졸저 <자존과 원칙의 힘>을 읽은 소감을 전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융성한 국운과 성취의 시대로 평가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먼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참고가 될 것이므로 어떤 분야,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지식인이든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책무가 있다.” 작은 경험과 생각일지라도 시대적 배경이 갖는 무게가 기록의 가치를 더 높여줄 것이라는 뜻이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은 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를 인공지능 만능의 세상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경험은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지식인의 전문적 경험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니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지식인의 선택적 권리가 아니라 역사적, 도덕적 책무다.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경구를 오늘 이 땅의 지식인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조 태 열
전 주유엔 대사 / 전 외교부 차관